사진이란 무엇인가
- Hyejung Lee

- 2023년 8월 7일
- 4분 분량
임선기 _ 시인,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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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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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영의 사진 세계에서 다시 떠오르는 질문
‘왜 그것이 있으며,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은 본질적 질문이다. 예술은, 그러한 본질적인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종교와 유사하다. 예술가 김우영에게 사진은 예술이며 종교이다. 그래서인지 김우영은 종교의 장소인 광야에서 살며 사찰에서 작업을 한다.
김우영에게 사진은 순간의 예술이 아니다. 순간에 오기까지 지속된 세계와 순간 이후 나타날 세계를 포함하는 영원을 순간 속에 담는 것이 김우영이 생각하는 사진이다. 판화작가이자 시인이었던 블레이크 (Blake, William) 의 생각이기도 한 그 생각은 낭만적이다. 그러한 낭만성의 종교성을 생각하면 다시 한 번 김우영의 사진 세계는 종교적이다. 김우영이 19세에 처음 찍은 사진과 20201년에 찍은 사진 사이에는 놀라운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대칭성’이다. 몬드리안의 그림에서처럼, 그의 사진 공간에서는 선들이 공간을 분할하며 면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면들이 대칭적으로 - 일견 비대칭적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 존재하다. 언어학자 야콥슨 (Jakoson, Roman) 은 평생 대칭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언어 속을 최대한 돌아다녔다. 왜 그랬을까? 대칭이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의 본질에는 대칭이라는 것이 존재론적 구조로 내재한다는 것이 야콥슨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구조주의라는 말은 이러한 야콥슨의 생각에서 태어난 말이다. 김우영은 사진이라는 언어 속에서 구조를 현상(develop)하는 본질주의자이다. 그런 만큼 그는 존재론적이고 그런 만큼 다시 종교적이다.
그렇다면 김우영에게 동양과 서양 또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공간은 큰 차이가 없다. 거기에서 그가 공히 찾는 것은 대칭이라고 압축해서 말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 대칭을 소위 이분법이라는 단순한 개념으로 전환하면 안 된다. 그 대칭은 황금 비율과 같은 개념에서 말하는‘비율 (proportion)’로 보는 것이 옳다. 비율을 폐쇄적 프레임으로 오해해도 안 된다. 비율은 창조적 황금 잣대와 같은 것이다. 비율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비율은 다양성의 원천이다. 인간의 창조 행위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율에 따라 창출하는 행위이다.‘비율에 따라’, 그것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날로지아(analogia)라 불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특히 시인이 비율에 따라 작업하는 데 뛰어나다고 말했다.
김우영은 대칭이라는 비율적 구조를 거쳐 시적 세계로 다가갔다. 그의 Boulevard(대로) 연작을 회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표층적이다. 심층에서 그 연작은 회화적인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다. 그의 눈 내리는 청평사와 소쇄원의 한옥 역시 시적이다. 그는 시적 고요에 다가가 있었다. 그의 최근 전시회 제목이‘Poetics of Tranquility (고요의 시학)’인 연유이다. 여기서 poetics는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메리엄-웹스터 (Merriam-Webster) 사전 속 poetics의 두 번째 개념, 즉 시적 느낌 또는 시적 발언에 가깝다. 그의 작업은 현재 고요에 대한 시적 느낌 혹은 시적 발언에 있다.
이렇게 김우영의 사진은 시로 가는 방편이 되어 있다. 김우영의 사진 세계에서 다시 떠오르는 질문,‘사진이란 무엇인가?’는 질문은 그래서 사진과 시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번역된다. 김우영이 광고 사진으로부터 자신의 사진을 시작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19세에 자신도 모르게 아날로지아의 세계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진실한 것이었다. 반면에 그의 광고 사진은 그가 현실과 만나는 방식이었다. 광고는 20세기 이후 최대의 수사학이다. 대량 생산된 상품이라는 근대의 산물을 팔기 위해 소비자를 설득하는 언어가 광고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저도 모르게 시학에 들어간 김우영이 뉴욕에서 진정한 현대 예술이 무엇인지를 목격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시 부지불식간에 시학에서 수사학으로 공간을 옮기고 말았던 것이다. 수사학의 공간에서 그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하고 대로들 (boulevards) 을 지나 광야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시학의 공간으로 자신을 정위치시켰다.
그러면 그의 수사학 시절은 전혀 의미가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광고 사진을 만들며 그는 이미지와 진실과의 거리를 최대로 느꼈다. 버거 (Berger, John) 의 말처럼(이하 『다른 방식으로 보기』, 최민 옮김, 열화당, 2012, 152-173 참조), 광고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선택적 자유를 선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광고는 오히려 남을 사로잡는 매력 (glamour), 즉 선망의 대상을 제작하는 과정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안에서 욕망을 짜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광고의 과정에서 김우영은‘진정한 자유’와‘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날마다 부각되고 절실해지는 음화(네거티브)를 마주하게 된다. 광고 사진은 또한 현대의 유화(painting)이다. 그것의 외피는 사진이지만 그것의 본질에는 유화의 현대적 버전이라는 측면이 있다. 유화를 차용한 수많은 광고 사진을 보라. 그러나 차용은 핵심이 아니다. 유화가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광고 사진은 사유재산에 대한, 소유에 대한 찬양이라는 미술의 소비형식을 미술관에서 화보 속으로 옮긴 장르이다. 반면교사가 되어 준 이곳에서 김우영은 진짜 사진은 유화와 다르다는 인식을 확실히 하게 된다. 화가였던 다게르(Daguerre, Louis) 가 사진가로 변신했듯, 사진으로 가려면 유화를 벗어나야 하다는 것이 김우영을 앞선다. 다시 말하지만, 김우영의 사진은 회화적이 아니다. 김우영의 사진은 회화적인 것을 넘어서는 도정에서 발생하고 성립한다. 그리고 그러한 김우영의 사진 세계의 발생학적 형태론은 앞서 말했듯 사진의 초기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그것은 또한 동시대의‘가난한 사진 (photographie pauvre)’현상만큼,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처음으로 돌아가며 현대적이다.
김우영이 뉴욕 비주얼 아트 스쿨에서 학생일 때 사진학과의 대표적 교재 중 하나가 벤야민 (Benjamin, Walter) 의 에세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벤야민의 유명한 산문 「기술복제시대의 에술작품」은 사실상 사진이 중심에 있는 예술론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진이 도착했을 때 유럽은 사회주의 물결이 대두되고 있었고 달리 말해 사회의 무게 중심이 유산계급에서 무산 계급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예술은 위기를 느끼고 그 중 일부가 이른바 순수 예술이라는 세계로 향했다. 발레리 (Valéry, Paul)가 현대예술의 상황에 대해 내린 진단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벤야민의 예의 예술론이 발레리의 문학적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라르메 (Mallarmé, Stéphane) 에 대한 언급으로 일단락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벤야민에 의하면 시의 분야에서 순수예술의 첫 자리에 선 시인이 바로 말라르메인 것이다. 사진이 주도하는 기술복제시대에 예술의 인프라가 혁명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인식한 말라르메와 발레리가 걸어간 길은 시를 물질세계로부터 가급적 멀리 탈주시켜 그 예술성 또는 진품성을 구하는 길이었다. 이 시 예술의 프로젝트야말로 진정한 현대시의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의 출현으로 인해 회화와 시만 위기를 느낀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이자 시인인 본느푸와 (Bonnefoy, Yves) 가 지적하고 있듯 (Poésie et Photographie, 시와 사진, Galilée, 2014 참조), 사진은 아제 (Atget, Eugène) 처럼 소설의 주요 무대인 거리를 현상하면서 소설에도 위기감을 주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사진도 소설도 모두 흑백이었다. 그러나 사진의 출현 이후에도 회화는 시는 소설은 사라지지 않았다. 콘웨이(Conway, Anna)의 말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It’s not going to happen like that」, 2013). 지금까지 그래왔듯 사진은 사진의 공간을 만들며 회화와 시와 소설과 공존할 것이다. 김우영의 「소쇄원 Ⅳ」 (2016) 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실체를 얻는다. 그 작품 속에서 사진은 회화와 시와 소설을 내부로 품어 안으며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사진과 시의 관계에 대한 중간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행정(行程)은 이제 처음의 질문,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적어도 현재 사진작가 김우영에게, 사진은 세계에 대한 시적 느낌 또는 시적 발언이거나, 시가 담기는 빛이다. 오래 전 은행이었던 그의 청계 스튜디오의 한 켠, 옛날에 금고가 있었던 자리에는 그 빛이 약간 뒤로 기울어진 채 바닥에 놓여있다. 그 흑백과 같은 빛 속에서 황금빛이 퍼져 있는 풍경이 변함없는 그의 오늘의 사진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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